세계사

로마의 별, 율리우스 카이사르 공화국을 넘어 제국으로

과거로의 초대 2024. 11. 26. 08:00

기원전 100년경, 로마 귀족 가문 율리우스 씨족에서 태어난 카이사르는 어릴 때부터 비범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가문은 오래된 명문이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중파(populares) 노선을 따르며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결성한 제1차 삼두정치로 로마 정계에 진입한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갈리아 전쟁과 군사적 천재성

갈리아 전쟁과 군사적 천재성

카이사르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것은 군사적 성공이었습니다. 기원전 58년부터 52년까지 이어진 갈리아 전쟁에서 그는 로마의 영토를 북해까지 확장시키며 군사적 천재성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갈리아 전기를 통해 전쟁 기록을 남기고 자신의 업적을 홍보한 점은 정치적 선전의 교과서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브리타니아 침공(기원전 55년)은 로마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가능성을 열어준 대담한 행보였습니다.

내전의 서막: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동맹은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깨졌고, 이로 인해 로마는 내전으로 돌입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는 불멸의 말을 남기고 정적들과의 결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파르살루스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며 로마를 장악하고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되었습니다.

암살과 비극적 최후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 특히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음모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 특히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음모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그를 향한 23번의 칼날은 공화국을 지키고자 했던 귀족들의 절박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로마를 또 다른 내전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유산: 황제의 이름이 되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업적과 지도력은 동로마의 '카이사르', 러시아의 '차르', 독일의 '카이저'와 같은 제국 통치자들의 칭호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저서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는 정치적 선전의 걸작이자 로마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