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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동천왕 - 위나라와의 충돌과 서안평 전투

과거로의 초대 2025. 2. 28. 08:00

고구려의 제11대 왕인 동천왕(東川王)은 227년부터 248년까지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 강화와 외교 전략에 중대한 전환점을 만든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으로 전해지며, 그의 통치는 단순히 영토 확장에만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가 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공손씨 세력과의 갈등

동천왕의 재위 초기,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公孫氏)와의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삼국 시대로,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으며, 공손씨는 요동에서 강력한 지역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동천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습니다. 그는 특히 오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공손씨와 위나라를 동시에 견제하려는 균형 전략을 구사했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위나라와의 충돌과 서안평 전투

위나라와의 충돌과 서안평 전투

238년,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가 군사를 이끌고 공손씨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요동은 위나라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들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위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242년, 동천왕은 선제적으로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위나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나라의 강력한 반격을 불러왔고, 결국 244년 위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후퇴와 재건, 고구려의 회복

위나라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었으나, 동천왕은 이를 좌절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압록강 너머로 피신해 고구려의 재건에 집중했습니다. 수도 함락이라는 치욕 속에서도 동천왕은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재정비해, 결국 고구려는 빠르게 회복세에 들어섰습니다.

동천왕의 통치는 고구려 역사에서 시련과 극복의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서안평 전투에서의 패배와 수도 함락이라는 위기를 겪었지만, 그의 지도력은 고구려가 빠르게 국력을 회복하고 이후의 성장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