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군주로 기록된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단순한 왕을 넘어 시대의 개척자였다. 그녀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신라를 지키고 번영으로 이끈 강인한 통치자였으며, 불교와 정치를 결합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성골 여왕의 탄생
선덕여왕의 본명은 덕만(德曼)으로,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장녀였다. 그녀는 신라의 최고 귀족 계층인 성골 출신으로, 이는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만이 속할 수 있는 혈통이었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신라의 최고 의결 기구인 화백회의는 덕만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는 당시 성골 남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교의 힘으로 다스린 왕국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불교를 통한 국정 운영에 집중했다. 그녀는 분황사(634년)와 영묘사(635년)를 창건하고,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자장법사를 귀국시켜 불교를 국가의 핵심 이념으로 삼았다.
특히 황룡사 9층 목탑은 그녀의 치세를 상징하는 거대한 건축물로, 높이 약 80m에 달하는 이 탑은 당시 신라의 호국 의지와 국력을 상징했다.
외침과 내란 속의 통치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40여 개의 성이 함락되고, 대야성마저 백제 장군 윤충에게 빼앗겼다.
이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중용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등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647년에는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키는 내홍까지 겪게 되었다.
총명한 왕의 전설
선덕여왕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 중 하나는 모란꽃 이야기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 그림을 본 그녀는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림 속에 벌과 나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모란꽃은 향기가 없었고, 이 일화는 선덕여왕의 통찰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 유언과 그녀의 유산
선덕여왕은 생전에 "내가 죽은 뒤에도 제석천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경주 낭산에 묻혔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과 그녀의 신앙심을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 낭산의 선덕여왕릉은 여전히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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