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48

찬란했던 발해, 그 시작과 끝

668년,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의 꿈은 쉽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대조영. 698년, 그는 동모산(東牟山)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세우고, 새로운 나라 진(震)국을 건국했습니다.훗날 이 나라는 국호를 발해(渤海)로 바꾸며 동북아시아에 다시 한 번 강대한 국가를 세우게 됩니다.발해의 영토와 세력 확장발해는 오늘날의 만주 대부분과 한반도 북부, 연해주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특히 동해 연안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발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예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수도를 정비하고, 왕실 제도를 마련하며, 중앙 관..

한국사 2025.04.29

신라를 새롭게 연 이방인, 석탈해

신라 초창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 인물이 유난히 눈에 띕니다. 바로 신라 제4대 왕, 석탈해(昔脫解)입니다. 석탈해는 신라의 토착 세력이 아닌,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지혜와 품성으로 신라 왕위에 오르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신비로운 탄생과 바다를 건넌 여정석탈해의 출생은 신화적 색채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무려 7년 동안 아이를 품은 끝에, 알을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왕은 이 알을 불길하게 여겨 바다에 띄워버리도록 명했지만, 궤짝에 담긴 알은 긴 항해 끝에 진한의 해변에 도착합니다.이곳에서 어부의 아내가 궤짝을 발견하고, 석탈해를 정성껏 키웠습니다. 그렇게 그는 신라 땅에 새로운 운명을 품고 태어난 셈이었습니다.신라에서 꽃피운 석탈해의 운명석탈해는..

한국사 2025.04.26

퇴각을 유도한 한 줄의 시 –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612년, 중국 대륙의 강국 수나라. 황제 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113만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대륙의 패권을 쥐고자 한 제국의 의지, 그리고 작은 나라 하나쯤은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오만이 뒤섞인 침공이었습니다.수나라 군은 탁군을 출발해 요동을 거쳐 평양을 향해 전진합니다. 그 중 30만 명은 평양을 직접 공격하기 위한 별동대로 빠르게 진군했지만, 그 앞에 거대한 장벽처럼 서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입니다.을지문덕의 '지연전술', 적을 지치게 하다을지문덕은 정면 승부를 피했습니다. 그는 수나라 군이 익숙하지 않은 지형 속에서 병참과 보급에 차질을 겪게 만들며, 계속된 야습과 교란으로 적을 지치게 했습니다.그리고, 결정적인..

한국사 2025.04.25

고구려 최후의 그림자, 연남생

634년, 고구려의 막강한 권력자 연개소문에게는 장남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연남생(淵男生). 훗날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 했지만,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권력과 피의 전쟁이었습니다.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권력의 공백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고구려의 최고 권력 자리인 '대막리지'는 장남 연남생에게로 넘어갔습니다.그러나 두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장악에 불복했고, 고구려는 순식간에 형제간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은 동생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권력은 피를 부르기 시작했고, 연남생은 결국 국내성을 떠나 도망치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자신을 몰아낸 고구려를 뒤로한 채, 적국 당나라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고구려를 향한 칼끝, 연남생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 정벌을 ..

한국사 2025.04.25

고구려의 지혜가 흐르던 곳, 요하 전투

612년, 수나라의 황제 수양제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합니다. 이 거대한 침공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니었습니다.수양제는 자신을 '중화 세계의 주인'으로 선언하며, 고구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 여겼습니다.그 첫 관문이 바로, 요하(遼河)였습니다.고구려의 철벽 방어선, 자연이 준 요새고구려는 요하를 방어선으로 삼아 수나라의 진군을 막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요하는 당시에도 강폭이 넓고 유속이 거센 강으로, 대규모 병력이 쉽게 건널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수나라군은 부교(浮橋)를 건설해 강을 건너려 했지만,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 강가에 매복해있었습니다. 화살이 날아들고, 불화살이 다리를 덮치며 수나라 병력은 강을 건너기도 전에 큰 ..

한국사 2025.04.21

연개소문, 역적인가 영웅인가? 고구려 최후의 권력자 이야기

7세기 중반, 당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외세 확장을 꾀하던 그때, 한반도의 북방에는 강대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흔히 '고구려 최후의 영웅'이라 불리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연개소문입니다.강화도에서 시작된 전설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연개소문이 말을 타고 훈련하던 치마대(馳馬臺), 무예를 익혔다는 오련정(五蓮井)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습니다.영류왕을 제거하다642년, 연개소문은 고구려 정치의 중심에 뛰어듭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외세에 유화적인 영류왕과 강경파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연개소문은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군사력을 동원해 정변..

한국사 2025.04.19

고구려를 꺾기 위한 수나라의 4번의 도전과 그 실패

6세기 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는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넓히려 했습니다. 그 목표 중 하나가 고구려였습니다.첫 침공은 598년, 수 문제의 명으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과 자연재해 등으로 수군은 큰 피해만 입고 퇴각하게 됩니다.612년, 수 양제는 모든 것을 걸고 제2차 고구려 침공에 나섭니다. 동원된 병력은 무려 113만 명에 달했습니다.수나라군은 음력 3월 15일 요하에 도달합니다. 탁군에서 출발한 병력이 모두 이동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였지만, 진군 속도는 매우 빨랐습니다.하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요하를 건너는 데만 두 달이 걸렸습니다. 병사들은 지치고 식량은 부족해졌습니다.이후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포위했지만, 한 달 넘게 이어진 공성전에서도 성을 ..

한국사 2025.04.18

광개토대왕 vs 후연: 요동을 둘러싼 패권 전쟁의 서막

4세기 말, 동북아시아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새로운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이 즉위했고, 서쪽에는 북중국과 요동을 지배하던 선비족 국가 후연(後燕)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두 국가는 결국 요동(遼東)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됩니다.요동은 단순한 국경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화북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에게는 전통적인 영향권이자 확장의 관문이었습니다. 후연 역시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이후, 고구려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합니다. 그리고 400년, 후연의 군주 모용성(慕容盛)은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속하고 강력한 반격으로 후연군을 격파하였고, 이 전투를 계기로 요동 지역에..

한국사 2025.04.12

광개토대왕과 왜의 전쟁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년,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단숨에 뒤흔드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고대 국가로 불리는 왜(倭)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왜의 침입과 신라의 요청4세기 말, 한반도의 남부는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신라는 왜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리며 국토의 안정은 물론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국력의 한계에 직면한 신라는 결국 북방의 강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응답한 이는 바로 광개토대왕. 400년, 그는 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며, 신라를 위협하던 왜군과 정면으로 맞섭니다.5만 대군, 남쪽으로 진군하다광개토대왕의 군대는 왜군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고구려군은..

한국사 2025.04.02

소금장수에서 정복 군주로: 고구려 중흥을 연 미천왕의 일대기

고구려 제15대 왕 미천왕(美川王)은 그 이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낸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로 알려져 있으며, 300년부터 331년까지 약 31년간 고구려를 다스리며 나라의 중흥기를 연 주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왕궁과는 거리가 먼 삶에서 시작했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궁궐이 아니라 소금장수였습니다.소금장수에서 왕이 되기까지미천왕은 서천왕의 손자였으나, 아버지 돌고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자결을 명받는 비운을 겪습니다. 이로 인해 어린 을불은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의 권력 중심에서 멀어진 촌락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점차 소금장수로 이어졌고, 평범한 백성의 삶 속에서 민심을 가까이에서 체득하게 되었습니..

한국사 202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