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56

장수왕, 79년의 통치로 고구려 최전성기를 열다!

고구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군주가 있다면, 단연코 장수왕(長壽王)일 것이다. 그는 412년부터 491년까지 장장 79년간 재위하며 고구려의 영광을 이끌었다. 그의 본명은 거련(巨連)으로,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방향으로 국가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특히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등, 남진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고구려를 동북아의 패자로 만들었다.수도 천도, 평양에서 펼쳐진 새로운 시대장수왕의 가장 상징적인 정책은 427년 수도 천도였다. 기존의 수도였던 국내성(오늘날 중국 지린성 지안)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 변화가 아니라,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과 대외 확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평양은 한반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한국사 2025.03.19

갈사국의 건국과 고구려로의 합병

갈사국은 서기 22년, 부여 왕자였던 갈사왕이 세운 나라로, 약 48년간 존재하다가 68년에 고구려로 귀속되었습니다. 부여의 한 왕자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결국 고구려와 융합되는 과정은 단순한 멸망의 역사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갈사국의 탄생: 부여에서의 이탈갈사국의 건국자는 부여의 왕자였던 갈사왕입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와의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서기 22년, 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부여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갈사왕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떠나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결심을 하게 됩니다.갈사왕은 약 10..

한국사 2025.03.19

견훤이 꿈꿨던 백제의 부활과 몰락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꿈꾼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견훤(甄萱). 그는 892년 무진주(현재의 광주)를 점령하며 독립 세력을 형성했고, 900년에는 완산주(현재의 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후백제, 고려, 신라가 공존하는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견훤, 신라의 장수에서 후백제의 왕이 되다견훤의 출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신라의 하급 군인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의 군대에서 성장한 그는 점차 세력을 키웠고,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르던 시기에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며 강력한 군벌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그는 백제의 옛 영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스스로를 백제의 계승자로 내세웠습니다.후백제의..

한국사 2025.03.18

고려 역대 왕 계보 34명의 군주가 남긴 발자취

고려 왕조는 918년 태조 왕건이 건국하여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될 때까지 약 475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고려는 군주제 국가였으며, 총 34명의 왕이 즉위하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고려 전기 (918~1170) -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1. 태조(太祖) 왕건 (918~943) -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혼인 정책과 회유책으로 호족을 통합하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북진 정책을 통해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습니다.2. 혜종(惠宗) (943~945) - 왕권 불안과 내분태조의 장남이었으나, 재위 기간이 짧고 왕위 계승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였습니다.3. 정종(定宗) (945~949) - 거란 대비와 수도 이전 시도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光軍)을 조직하였으며,..

한국사 2025.03.17

조선 역대 왕 계보 27명의 군주가 남긴 발자취

조선 왕조는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518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을 다스린 왕은 총 27명으로, 각기 다른 정치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라를 이끌었습니다.조선 전기 (1392~1592) - 건국과 안정1. 태조 (1392~1398) - 조선 건국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습니다.2. 정종 (1398~1400) - 짧은 재위와 양위왕자의 난 이후 즉위했으나,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났습니다.3. 태종 (1400~1418) - 강력한 왕권 확립사병을 혁파하고 6조 직계제를 도입하며,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했습니다.4. 세종 (1418~1450) - 문화와 과학의 황금기훈민정음을 창제하..

한국사 2025.03.16

고구려의 거센 파도 속에서 – 백제 아신왕의 생존 전략

백제의 제17대 왕인 아신왕(阿莘王)은 392년부터 405년까지 재위하며,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맞서 백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기보다는 점차 쇠퇴하는 시기로, 특히 광개토대왕의 침략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고구려의 압박과 영토 상실아신왕이 즉위하던 시기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하던 때였습니다. 백제는 오랫동안 한반도 중부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떨쳤으나, 395년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한강 이북 지역을 비롯한 주요 영토를 상실하였고, 이후로도 고구려의 지속적인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왜국과의 외교 관계 강화국내적으로 ..

한국사 2025.03.03

서안평 전투에서 시작된 동북아 패권 경쟁

고구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가 바로 서안평 전투(西安平 戰鬪)입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중국 세력과의 본격적인 충돌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고구려가 동북아시아 패권을 두고 벌인 치열한 투쟁의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서안평의 전략적 가치서안평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요동군(遼東郡)에 속한 한나라의 속현으로,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동북 지역에 해당합니다.  특히 압록강 하류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구려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이 지역을 장악하면 요동의 군사적, 경제적 자원을 흡수할 수 있었고, 중국 세력의 동북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고구려의..

한국사 2025.03.01

고구려 동천왕 - 위나라와의 충돌과 서안평 전투

고구려의 제11대 왕인 동천왕(東川王)은 227년부터 248년까지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 강화와 외교 전략에 중대한 전환점을 만든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으로 전해지며, 그의 통치는 단순히 영토 확장에만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가 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공손씨 세력과의 갈등동천왕의 재위 초기,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公孫氏)와의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삼국 시대로,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으며, 공손씨는 요동에서 강력한 지역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동천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습니다. 그는 특히 오나라와 우호적..

한국사 2025.02.28

신라의 기틀을 세운 개혁 군주, 지증왕의 업적과 유산

신라의 제22대 왕인 지증왕(智證王)은 500년부터 514년까지 재위하며 신라의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 군주입니다. 그의 본명은 김지대(金智大)로,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습보 갈문왕, 어머니는 조생부인입니다. 6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국력 강화에 힘을 쏟았으며, 그의 통치는 신라가 삼국시대 강국으로 자리 잡는 기반이 되었습니다.신라라는 이름의 시작과 왕호의 개혁지증왕 재위 시기에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국호와 왕호의 개정이었습니다. 503년, 그는 이전까지 사용되던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는 국호를 신라(新羅)로 공식 변경했습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폐지하고, 보다 위계적이..

한국사 2025.02.27

백제의 황금기를 연 근초고왕의 정복과 번영

백제의 제13대 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하며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본명은 여구(餘句)로, 비류왕의 직계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근초고왕의 치세는 백제가 명실상부한 한반도 서남부의 강국으로 자리 잡은 시기로, 정치적 안정과 영토 확장을 통해 왕국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시기였습니다. 마한 정복과 남부 통일근초고왕은 재위 초부터 왕권 강화를 위한 군사적 정복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목표는 백제 남쪽의 마한 잔여 세력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마한의 마지막 잔존 세력은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완전히 정복되었고, 이로써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고구려와의 전쟁, 평양성 함락근초고..

한국사 20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