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갈사국의 건국과 고구려로의 합병

과거로의 초대 2025. 3. 19. 08:00

갈사국은 서기 22년, 부여 왕자였던 갈사왕이 세운 나라로, 약 48년간 존재하다가 68년에 고구려로 귀속되었습니다. 부여의 한 왕자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결국 고구려와 융합되는 과정은 단순한 멸망의 역사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집들이 있는 평화로운 마을 모습

갈사국의 탄생: 부여에서의 이탈

갈사국의 건국자는 부여의 왕자였던 갈사왕입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와의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서기 22년, 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부여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갈사왕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떠나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결심을 하게 됩니다.

갈사왕은 약 1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남하하여 압록곡(鴨淥谷)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해두국(海頭國)이라는 작은 나라의 왕과 조우하게 되었고, 그를 사살한 후 해두국의 백성들을 흡수하여 갈사수(曷思水) 주변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사국의 시작이었습니다.

고구려와의 관계: 혼인 동맹과 공존

갈사국은 지리적으로 부여와 고구려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두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갈사왕은 고구려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가의 존속을 도모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혼인 동맹입니다. 갈사왕의 손녀인 해씨 부인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궁이 되었고, 그녀는 호동왕자를 낳았습니다. 이는 갈사국이 단순한 고구려의 속국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도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갈사국의 몰락과 고구려로의 귀속

갈사국은 약 3대에 걸쳐 48년간 지속되었으나, 결국 자체적인 힘만으로는 존속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 왕이었던 도두왕은 68년, 나라를 고구려에 바치고 스스로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구려에서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았으며, 갈사국의 백성들도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