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23

퇴각을 유도한 한 줄의 시 –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612년, 중국 대륙의 강국 수나라. 황제 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113만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대륙의 패권을 쥐고자 한 제국의 의지, 그리고 작은 나라 하나쯤은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오만이 뒤섞인 침공이었습니다.수나라 군은 탁군을 출발해 요동을 거쳐 평양을 향해 전진합니다. 그 중 30만 명은 평양을 직접 공격하기 위한 별동대로 빠르게 진군했지만, 그 앞에 거대한 장벽처럼 서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입니다.을지문덕의 '지연전술', 적을 지치게 하다을지문덕은 정면 승부를 피했습니다. 그는 수나라 군이 익숙하지 않은 지형 속에서 병참과 보급에 차질을 겪게 만들며, 계속된 야습과 교란으로 적을 지치게 했습니다.그리고, 결정적인..

한국사 2025.04.25

고구려 최후의 그림자, 연남생

634년, 고구려의 막강한 권력자 연개소문에게는 장남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연남생(淵男生). 훗날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 했지만,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권력과 피의 전쟁이었습니다.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권력의 공백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고구려의 최고 권력 자리인 '대막리지'는 장남 연남생에게로 넘어갔습니다.그러나 두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장악에 불복했고, 고구려는 순식간에 형제간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은 동생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권력은 피를 부르기 시작했고, 연남생은 결국 국내성을 떠나 도망치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자신을 몰아낸 고구려를 뒤로한 채, 적국 당나라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고구려를 향한 칼끝, 연남생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 정벌을 ..

한국사 2025.04.25

고구려의 지혜가 흐르던 곳, 요하 전투

612년, 수나라의 황제 수양제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합니다. 이 거대한 침공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니었습니다.수양제는 자신을 '중화 세계의 주인'으로 선언하며, 고구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 여겼습니다.그 첫 관문이 바로, 요하(遼河)였습니다.고구려의 철벽 방어선, 자연이 준 요새고구려는 요하를 방어선으로 삼아 수나라의 진군을 막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요하는 당시에도 강폭이 넓고 유속이 거센 강으로, 대규모 병력이 쉽게 건널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수나라군은 부교(浮橋)를 건설해 강을 건너려 했지만,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 강가에 매복해있었습니다. 화살이 날아들고, 불화살이 다리를 덮치며 수나라 병력은 강을 건너기도 전에 큰 ..

한국사 2025.04.21

소금장수에서 정복 군주로: 고구려 중흥을 연 미천왕의 일대기

고구려 제15대 왕 미천왕(美川王)은 그 이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낸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로 알려져 있으며, 300년부터 331년까지 약 31년간 고구려를 다스리며 나라의 중흥기를 연 주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왕궁과는 거리가 먼 삶에서 시작했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궁궐이 아니라 소금장수였습니다.소금장수에서 왕이 되기까지미천왕은 서천왕의 손자였으나, 아버지 돌고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자결을 명받는 비운을 겪습니다. 이로 인해 어린 을불은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의 권력 중심에서 멀어진 촌락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점차 소금장수로 이어졌고, 평범한 백성의 삶 속에서 민심을 가까이에서 체득하게 되었습니..

한국사 2025.03.29

백제 개로왕 - 왕권 강화와 수도 함락의 비극

5세기 후반, 백제는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개로왕(蓋鹵王)이 재위하던 시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개로왕은 외교와 군사적 대응을 통해 국가를 지키려 했으나, 결국 수도 한성이 함락되며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개로왕은 455년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즉위한 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당시 백제는 귀족 세력이 강성해 왕권을 위협하는 상황이었으며, 개로왕은 이에 맞서 부여(扶餘) 왕족 출신들을 주요 관직에 배치하며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의 반발은 여전했고, 내부 정치적 갈등은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고구려와의 긴장, 그리고 북위와의 외교5세기 들어 고구려..

한국사 2025.03.21

장수왕, 79년의 통치로 고구려 최전성기를 열다!

고구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군주가 있다면, 단연코 장수왕(長壽王)일 것이다. 그는 412년부터 491년까지 장장 79년간 재위하며 고구려의 영광을 이끌었다. 그의 본명은 거련(巨連)으로,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방향으로 국가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특히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등, 남진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고구려를 동북아의 패자로 만들었다.수도 천도, 평양에서 펼쳐진 새로운 시대장수왕의 가장 상징적인 정책은 427년 수도 천도였다. 기존의 수도였던 국내성(오늘날 중국 지린성 지안)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 변화가 아니라,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과 대외 확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평양은 한반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한국사 2025.03.19

갈사국의 건국과 고구려로의 합병

갈사국은 서기 22년, 부여 왕자였던 갈사왕이 세운 나라로, 약 48년간 존재하다가 68년에 고구려로 귀속되었습니다. 부여의 한 왕자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결국 고구려와 융합되는 과정은 단순한 멸망의 역사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갈사국의 탄생: 부여에서의 이탈갈사국의 건국자는 부여의 왕자였던 갈사왕입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와의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서기 22년, 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부여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갈사왕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떠나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결심을 하게 됩니다.갈사왕은 약 10..

한국사 2025.03.19

서안평 전투에서 시작된 동북아 패권 경쟁

고구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가 바로 서안평 전투(西安平 戰鬪)입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중국 세력과의 본격적인 충돌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고구려가 동북아시아 패권을 두고 벌인 치열한 투쟁의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서안평의 전략적 가치서안평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요동군(遼東郡)에 속한 한나라의 속현으로,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동북 지역에 해당합니다.  특히 압록강 하류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구려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이 지역을 장악하면 요동의 군사적, 경제적 자원을 흡수할 수 있었고, 중국 세력의 동북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고구려의..

한국사 2025.03.01

고구려 동천왕 - 위나라와의 충돌과 서안평 전투

고구려의 제11대 왕인 동천왕(東川王)은 227년부터 248년까지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 강화와 외교 전략에 중대한 전환점을 만든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으로 전해지며, 그의 통치는 단순히 영토 확장에만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가 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공손씨 세력과의 갈등동천왕의 재위 초기,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公孫氏)와의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삼국 시대로,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으며, 공손씨는 요동에서 강력한 지역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동천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습니다. 그는 특히 오나라와 우호적..

한국사 2025.02.28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이끈 광개토대왕의 전성기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374년에 태어나 391년부터 412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의 본명은 담덕(談德)으로, 아버지는 고국양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를 이끈 군주로 기억됩니다. 그의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넓고 크게 열어’ 국가의 위상을 동북아시아 전역에 떨쳤습니다.백제 정벌과 남하 정책광개토대왕의 가장 인상적인 업적 중 하나는 백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었습니다. 392년, 그는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백제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 대규모 전쟁에서 고구려군은 백제의 주요 성곽인 석현성을 포함해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고구려..

한국사 202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