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후반, 백제는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개로왕(蓋鹵王)이 재위하던 시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개로왕은 외교와 군사적 대응을 통해 국가를 지키려 했으나, 결국 수도 한성이 함락되며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
개로왕은 455년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즉위한 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당시 백제는 귀족 세력이 강성해 왕권을 위협하는 상황이었으며, 개로왕은 이에 맞서 부여(扶餘) 왕족 출신들을 주요 관직에 배치하며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의 반발은 여전했고, 내부 정치적 갈등은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와의 긴장, 그리고 북위와의 외교
5세기 들어 고구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427년),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개로왕은 472년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고구려가 강성해져 백제를 위협하고 있으며,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의 균형을 위해 북위가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북위는 개로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백제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되는 상황에 놓였다.
한성을 지키기 위한 사투
결국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공격했다. 백제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불과 7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개로왕은 왕족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으나,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혔다. 장수왕은 백제 왕권의 상징인 개로왕을 처형함으로써, 백제에 큰 충격을 주고자 했다. 기록에 따르면, 개로왕은 치욕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으며, 이는 백제 왕실과 백성들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았다.
백제의 수도 함락과 웅진 천도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이 무너지면서,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은 살아남은 백성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해 웅진(熊津, 현재의 공주)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는 경제적·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국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 사건은 백제의 전성기였던 한성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후 백제는 한반도 남부로 세력을 옮기며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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