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개소문, 역적인가 영웅인가? 고구려 최후의 권력자 이야기

과거로의 초대 2025. 4. 19. 06:03

7세기 중반, 당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외세 확장을 꾀하던 그때, 한반도의 북방에는 강대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흔히 '고구려 최후의 영웅'이라 불리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연개소문입니다.

강화도 절벽 위에서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고구려 장군 연개소문, 바람에 휘날리는 망토와 함께 결연한 눈빛으로 서 있는 모습, 뒤로는 격랑 이는 바다와 운무 낀 하늘이 펼쳐진 영웅 탄생의 순간을 묘사한 애니메이션 스타일 일러스트

강화도에서 시작된 전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연개소문이 말을 타고 훈련하던 치마대(馳馬臺), 무예를 익혔다는 오련정(五蓮井)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습니다.

영류왕을 제거하다

642년, 연개소문은 고구려 정치의 중심에 뛰어듭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외세에 유화적인 영류왕과 강경파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연개소문은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군사력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고, 끝내 영류왕을 제거합니다.

이후 그는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고구려 최고 권력자인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실질적인 통치자가 됩니다.

안시성 전투의 치열한 공방을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사실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고구려와 당나라, 피할 수 없는 충돌

당시 세계 최강국이라 불리던 당나라는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수차례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단호히 막아냈습니다.

특히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이끄는 대군을 맞아 벌인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의 저력을 보여준 역사적 승리였습니다. 안시성 성주와 군사들은 당군을 철저히 물리쳤고, 당 태종은 결국 회군하고 말았습니다.

신라와의 협상, 놓쳐버린 기회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하던 시기. 남쪽의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고구려와의 협력을 시도했고, 외교 사절로 김춘추를 파견합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냉정히 거절합니다. 오히려 고구려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결국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외교를 포기하고 당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외교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사신의 애니스타일 이미지

이 결정은 훗날 나당 동맹으로 이어지며, 고구려에게는 외교적 고립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연개소문의 강경한 대외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고구려의 위세를 높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외교적 고립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만약 그가 김춘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고구려의 멸망, 그리고 남겨진 그림자

665년, 연개소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고구려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국론은 분열되었고, 내부 혼란은 외적의 침입을 막아낼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결국 668년,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은 고구려를 침공했고,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습니다.

영웅인가, 역적인가?

연개소문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전통 유교사관에서는 군주를 시해한 '역적'으로 보았지만, 근현대에 들어서는 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영웅'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