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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후의 그림자, 연남생

634년, 고구려의 막강한 권력자 연개소문에게는 장남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연남생(淵男生). 훗날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 했지만,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권력과 피의 전쟁이었습니다.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권력의 공백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고구려의 최고 권력 자리인 '대막리지'는 장남 연남생에게로 넘어갔습니다.그러나 두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장악에 불복했고, 고구려는 순식간에 형제간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은 동생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권력은 피를 부르기 시작했고, 연남생은 결국 국내성을 떠나 도망치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자신을 몰아낸 고구려를 뒤로한 채, 적국 당나라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고구려를 향한 칼끝, 연남생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 정벌을 ..

한국사 2025.04.25

고구려의 지혜가 흐르던 곳, 요하 전투

612년, 수나라의 황제 수양제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합니다. 이 거대한 침공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니었습니다.수양제는 자신을 '중화 세계의 주인'으로 선언하며, 고구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 여겼습니다.그 첫 관문이 바로, 요하(遼河)였습니다.고구려의 철벽 방어선, 자연이 준 요새고구려는 요하를 방어선으로 삼아 수나라의 진군을 막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요하는 당시에도 강폭이 넓고 유속이 거센 강으로, 대규모 병력이 쉽게 건널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수나라군은 부교(浮橋)를 건설해 강을 건너려 했지만,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 강가에 매복해있었습니다. 화살이 날아들고, 불화살이 다리를 덮치며 수나라 병력은 강을 건너기도 전에 큰 ..

한국사 2025.04.21

연개소문, 역적인가 영웅인가? 고구려 최후의 권력자 이야기

7세기 중반, 당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외세 확장을 꾀하던 그때, 한반도의 북방에는 강대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흔히 '고구려 최후의 영웅'이라 불리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연개소문입니다.강화도에서 시작된 전설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연개소문이 말을 타고 훈련하던 치마대(馳馬臺), 무예를 익혔다는 오련정(五蓮井)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습니다.영류왕을 제거하다642년, 연개소문은 고구려 정치의 중심에 뛰어듭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외세에 유화적인 영류왕과 강경파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연개소문은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군사력을 동원해 정변..

한국사 2025.04.19

고구려를 꺾기 위한 수나라의 4번의 도전과 그 실패

6세기 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는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넓히려 했습니다. 그 목표 중 하나가 고구려였습니다.첫 침공은 598년, 수 문제의 명으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과 자연재해 등으로 수군은 큰 피해만 입고 퇴각하게 됩니다.612년, 수 양제는 모든 것을 걸고 제2차 고구려 침공에 나섭니다. 동원된 병력은 무려 113만 명에 달했습니다.수나라군은 음력 3월 15일 요하에 도달합니다. 탁군에서 출발한 병력이 모두 이동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였지만, 진군 속도는 매우 빨랐습니다.하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요하를 건너는 데만 두 달이 걸렸습니다. 병사들은 지치고 식량은 부족해졌습니다.이후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포위했지만, 한 달 넘게 이어진 공성전에서도 성을 ..

한국사 2025.04.18

광개토대왕 vs 후연: 요동을 둘러싼 패권 전쟁의 서막

4세기 말, 동북아시아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새로운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이 즉위했고, 서쪽에는 북중국과 요동을 지배하던 선비족 국가 후연(後燕)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두 국가는 결국 요동(遼東)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됩니다.요동은 단순한 국경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화북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에게는 전통적인 영향권이자 확장의 관문이었습니다. 후연 역시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이후, 고구려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합니다. 그리고 400년, 후연의 군주 모용성(慕容盛)은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속하고 강력한 반격으로 후연군을 격파하였고, 이 전투를 계기로 요동 지역에..

한국사 2025.04.12

선비족의 제국 후연, 고구려와 충돌하다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졌던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몰락 이후 북방은 수많은 이민족 정권들이 흥망을 거듭하는 시기로 접어듭니다. 이때, 몰락한 전연(前燕)의 왕족이었던 모용수(慕容垂)가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연(燕)’이라는 국호를 다시 들고 나서며, 384년 후연(後燕)을 세웁니다.모용수는 본래 전진의 황제 부견 휘하에서 복무했던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대패하자, 혼란한 정세를 틈타 하북 지역으로 진출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고, 중산(中山)을 수도로 삼아 즉위하게 됩니다. 이 국가는 국호는 '연'이지만, 앞서 존재했던 전연과 구분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후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초기의 후연은 강력한 군사력과 행정력을 바탕으로..

중국사 2025.04.09

광개토대왕과 왜의 전쟁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년,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단숨에 뒤흔드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고대 국가로 불리는 왜(倭)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왜의 침입과 신라의 요청4세기 말, 한반도의 남부는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신라는 왜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리며 국토의 안정은 물론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국력의 한계에 직면한 신라는 결국 북방의 강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응답한 이는 바로 광개토대왕. 400년, 그는 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며, 신라를 위협하던 왜군과 정면으로 맞섭니다.5만 대군, 남쪽으로 진군하다광개토대왕의 군대는 왜군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고구려군은..

한국사 2025.04.02

소금장수에서 정복 군주로: 고구려 중흥을 연 미천왕의 일대기

고구려 제15대 왕 미천왕(美川王)은 그 이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낸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로 알려져 있으며, 300년부터 331년까지 약 31년간 고구려를 다스리며 나라의 중흥기를 연 주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왕궁과는 거리가 먼 삶에서 시작했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궁궐이 아니라 소금장수였습니다.소금장수에서 왕이 되기까지미천왕은 서천왕의 손자였으나, 아버지 돌고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자결을 명받는 비운을 겪습니다. 이로 인해 어린 을불은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의 권력 중심에서 멀어진 촌락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점차 소금장수로 이어졌고, 평범한 백성의 삶 속에서 민심을 가까이에서 체득하게 되었습니..

한국사 2025.03.29

중원의 북방문, 연나라의 부상과 고조선과의 충돌

기원전 11세기부터 시작되어 전국 시대를 거쳐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중국 북방의 강국이었던 연나라(燕)는 단순한 제후국 이상의 존재였다. 오늘날의 베이징 일대에 뿌리를 둔 이 나라는 고조선과의 접경지로서, 문명과 야만, 중원과 변방이 만나는 가장 치열한 경계선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나라의 역사는 단지 하나의 나라가 생겨나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학 구도 속에서 북방 민족, 고조선, 그리고 중국 중심부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보여주는 장대한 서사였다.북방의 요충지에서 전국 칠웅으로연나라는 원래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춘추 시대를 지나면서 이 작은 북방 국가는 점차 강력한 군사적 존재감을 키워나갔고, 마침내 전국 칠웅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다. 특히 연 소왕(昭王)의 치세는 연..

중국사 2025.03.28

북위, 북방 기마 민족의 제국이 되다

중국의 역사에서 북방 민족이 한족을 지배한 사례는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북위(北魏)는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다. 386년에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북위는 혼란스러웠던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후 남북조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들은 단순한 유목 국가가 아니라 한화(漢化) 정책을 통해 중국식 통치 체제를 정착시키며 화북 지역을 통일했다.선비족의 등장과 북위의 건국북위의 창시자인 도무제(道武帝, 탁발규 拓跋珪)는 386년 후연(後燕)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며 강력한 국가 기반을 다졌다. 398년에는 수도를 평성(平城, 현재의 산서성 대동)으로 옮겨 북방 지배를 더욱 강화했다.북위는 초기에 기마 전술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북..

중국사 2025.03.22